(함양)산높고 물맑은 아름다운 곳에 깃든 고고한 선비문화 

 

- 일시: 2023-9-23~24
- 날씨: 대체로 맑음
- 몇명: 홀로

 

 

올바른 역사관이란 현재에서 과거 역사가 펼친 명암을 최대한 이성적, 합리적, 상식적으로 보려는 시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탁영 김일손이 연산군이라는 혼매한 왕이 세상을 어떻게 만들것인지 예견한 시가 있습니다. 

위로 임금이 혼매하니 主昏於上

아래에서 선비가 격분하다 士激於下

당고의 화 일어나 黨錮禍作

백성이 우러러보고 믿는 이들이 형을 받으니 崇信刑餘

삼백 년 키운 인재를 三百年儲養之人才

초개만큼도 여기지 않았구나 視草芥之不如


임금의 어리석음으로 나라의 인재들이 몰살당하는 참화가 예견된다는 것이었으며 이후 실제로 그런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때의 그런 분위기를 잘 알 수 있는 곳이 함양이었습니다. 





 

▷ 답사일정(風輪) :375km

 

장수사,용추사-승안사지 삼층석탑,일두 정여창 묘역-춘수정-청계서원,남계서원-최치원역사공원-함양박물관

 

2023-9-23

 

용추사 입구 장수사 일주문에 도착하여 휴식을 취합니다.무수한 별들이 보입니다.단청에 형광물질이 묻어 있는지 푸른 야광을 뿜어냅니다.

 

▷장수사일주문

장수사는 설차상언대사가 전국의 승려들을 모아놓고 화엄경을 강의했던 유명한 곳으로 전해지고 있고,용추사 뒷편 용추계곡 상류에는 기백산이 있고 서북쪽 산 정상에는 정유재란때 왜구와 혈전이 벌어졌던 황석산성이 있습니다.

장수사는 일주문만 남았습니다. 장수사는 폐사지입니다.

 

2023-9-24

 

▷용추사: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용추계곡로 17-11

 

용추사는 신라 소지왕 9년에 각연대사가 창건한 옛 장수사와 4대 부속 암자 중에서 현존하는 유일한 사찰로 현재는 해인사의 말사입니다.

 

용추계곡 속에 용추폭포가 있는데 이 계곡은 많은 선비들이 찾아와 글을 남긴 곳으로 심진동(尋眞洞)이라고 불렸는데 뜻은 "진경(眞景)을 찾아 스스로 떠난다"입니다. 폭포의 높이는 30M이고,용소의 직경은 25M입니다. 

신라시대 사찰이지만 현재의 모습은 1959년 재건하였습니다.

▷승안사지 석조여래좌상

좌상이라는 의미는 앉아 있다는 것인데 실재로는 하반신이 땅에 묻혀 있으니 입상입니다.현재 보이는 것만해도 280cm가 되니 상당히 큰 불상입니다.오른팔은 떨어져 나갔고 머리는 몸에 비해 큰 편입니다.일자로 다문 입 때문에 엄하다는 인상을 줍니다.전체적으로 보면 고려시대 석불상입니다.

▷승안사지(昇安寺址) 3층석탑: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승안길 22

고려시대에 건립된 삼층석탑으로, 높이는 약 4.3m입니다.1층 몸돌 각 면에는 사천왕상이 새겨져있고 2층에는 부처,보살,비천이 새겨져 있으며 고려전기 작품입니다.승안사지도 폐사지입니다.

▷일두 정여창 묘역

 

일두 정여창은 성리학의 대가로 경서와 사기에 통달하였는데 주로 지식과 행동이 서로 일치하는 지행일치를 위한 독서를 하였습니다.무오사화로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된지 5년만에 그곳에서 타계하였으며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 되었습니다.묘역은 승안사 바로 옆 구릉에 있습니다.조선전기 사대부의 무덤양식을 잘 보여주고 묘역 안의 석물들도 볼만합니다.

 

 

일두 정여창의 영향을 미친 것은 가문의 영향,스승의 가르침,친구와의 교유로 본다면

(1.가문의 영향) 부친이 평안도 함경도 병마우후로 있을때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 토벌 중 순국하여 충효정신을 새겼으며 부친이 안계신 집안의 일은 흔들림없이 처리하라는 모친에게서 많이 배웠다고 합니다.부친은 길주에서 순국했는데 정여창이 17세의 나이로 2천여길의 길을 걸어 보름만에 당도하여 시체더미에서 부친의 시신을 찾아 염습,입관하여 관을 거적으로 싸서 2개월여에 걸쳐 운구해 승안동 새암산에 안장하고 3년 시묘살이를 했다고 합니다. 부친의 순국이 하도 슬퍼서 술로 달래고 있을때 모친의 간곡하고 엄격한 질책이 있었습니다. "오직 너만을 의지하는데 이와 같은 너의 모습을 보니 나는 누구를 의지하고 살아가야 하느냐!"하여 이후 정여창은 완전히 술을 끊었습니다. 성균관 시절 남효온과 같은 벗을 만날 때도 모친과의 약속을 지켰고 예문관 검열 겸 세자시강원 설서로 있을 때 임금이 내린 술까지 마시지 않았습니다. "신의 어미가 살아 있을 때 일찍이 술을 마신 일로 꾸중을 듣고서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개과천선(改過遷善)의 길, 이것이 정여창의 참 모습이었습니다.

 

(2.스승의 가르침)정여창의 처음 스승은 율정 이관의였는데 경학과 역수에 밝고 성리학에 정숙했다고 합니다.다음 스승은 사림파의 영수인 점필재 김종직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유학은 안향-이색-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으로 이어졌습니다.특히 김종직의 제자 중 정여창과 김굉필이 유학의 정맥을 이었습니다.정여창과 김굉필은 짐종직으로 부터 소학을 기초로 성리학과 심학을 거쳐 도학의 과정을 배웠습니다. 한훤당 김굉필과 일두 정여창에 대해서는 합천 편에서 소학당에서 뜻을 같이 한다는 지동암(志同巖)에서 언급되었습니다.김굉필과 마찬가지로 일두 정여창도 소학을 중시했습니다.

 

(3.친구와의 교유) 친구로는 우선 김굉필이 있는데 거창 모현정,수폭대의 원두양선생 강도지소,합천의 소학당,숭현사,달성 제일강산 이노정 등에서 교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그리고 무오 갑자사화때 희생된 김일손,남효온,이수공,표연말,조위,강혼이 있습니다.양 사화에 희생을 면한 친구는 양관,유호인,조신,임대동,한인효,정영수,정여해,양희지,윤효손등이 있습니다. 김일손과는 같이  두류산(지리산)을 함께 등람(등산과 관람)했고 하동 악양정,청계정사에서 학문논의와 정을 나누었습니다.그래서 화순 해망서원과 하동 덕은사에서 같이 제향하고 있습니다.   

무오사화를 당한 이유는 점필재의 제자라는 것과 명분상으로는 "정분전"을 쓴 것을 문제 삼았습니다.

 

뒤쪽의 좌측은 하동 정씨의 재실인 여재각(如在閣)이 보이고 우측은 승안사지 석조여래좌상 그리고 앞에 보이는 것은 승안사지 3층석탑입니다.

 

▷춘수정: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361(구라 동구길 4-9)

춘수당 정수민은 일두 정여창의 증손으로 소일두(小一蠹)로 불리었습니다.그가 남긴 글 중 하나인 무오사화에 대한 한시입니다.

鳴呼戊午年間事 명호무오년간사
慾向蒼天問厥由 욕향창천문궐유
天不可階難可訴 천불가계난가소
涕隨遺憤滿衿流 체수유분만금류

 

아아 슬프도다 무오사화 일어난 일
푸른하늘 바라보며 물어보고 싶지만 
하늘에 오를 수 없어 호소하기 어려워 
눈물이 울분을 따라 옷깃에 젖어드네

바윗돌 비석을 보면 울분을 토하며 물어보고 싶어서 하늘로 향하는 듯 합니다. 

(필사)

▷청계서원

청계서원은 탁영 김일손의 위패를 모신 곳입니다.김일손은 역사의 준엄함과 사관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일깨워 준 분입니다.원래는 청계정사는 탁영 김일손이 한동안 공부를 한 곳인데 이후 청계서원으로 바뀌었습니다.연산군때 조의제문으로 무오사화때 희생되었습니다.

연산군 4년(1498) 7월 정여창은 함양에 있었고 김일손이 찾아왔습니다. 연산군 원년(1496) 정계를 은퇴하여 공부하며 지낼 요량으로 정여창의 이웃 마을 남계에 정사(精舍)를 마련해 놓았다가 모친상을 마치고 들어왔던 것입니다.두 사람은 시국을 근심하였습니다. 김일손이 말하기를

선왕(先王) 때 젊고 뜻있는 선비가 요순시대를 이룩할 수 있다는 포부로 극언을 꺼리지 않아 권간(權奸)의 미움을 샀는데, 이제 시대가 바뀌고 세태가 변하여 간신들이 뜻을 얻었으니 머지않아 화가 박두할 것입니다. 『탁영선생연보』연산군 4년 7월조

 

성종 치세에 치세를 이룩하고자 한 비판적 언론활동이 머지않아 보복을 당할 것이라는 우려였습니다. 정여창도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김일손이「취성정부(聚星亭賦)」를 지어 보였습니다. 후한 시절 환관의 횡포와 권세에 고담준론으로 대항하던 선비들이 화를 입은 '당고(黨錮)의 화'를 소재로 삼은 노래였습니다.

 

  위로 임금이 혼매하니 主昏於上

  아래에서 선비가 격분하다 士激於下

  당고의 화 일어나 黨錮禍作

  백성이 우러러보고 믿는 이들이 형을 받으니 崇信刑餘

  삼백 년 키운 인재를 三百年儲養之人才

  초개만큼도 여기지 않았구나 視草芥之不如

 

임금의 어리석음으로 나라의 인재들이 몰살당하는 참화가 예견된다는 것었습니다.정여창이 '걱정이 너무 깊은 것 같다' 위안하였지만 내심 불안은 매한가지였을 것입니다.

▷남계서원: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남계서원길 8-14

조선시대의 유학자 정여창 선생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서원입니다.이 서원은 소수서원에 이어 두번째로 오래된 서원입니다.

맨 앞에 있는 누각은 풍영루로 유생들이 공부를 하거나 손님이 오면 학문을 토론하고 정담을 나누던 장소입니다.논어의 내용 중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風)을 쏘이고 노래(詠)하며 돌아오겠다"라는 뜻을 여기서 느낄 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로 지어졌습니다. 기수와 무우는 "전설 속에 나오는 곳"입니다.



탁영 김일손은 정여창에게 당부하였습니다. "몸을 보전하시고 도를 이루시라." 자신이 지은 「정분전」이 사초에 실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던 정여창도 무사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정여창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도 곧 뒤따라가겠다."

 

정여창은 죽는 날까지 태연하고 원망하거나 후회하는 빛이 조금도 없었다고 합니다.

두견새는 무슨 일로 눈물로 산꽃을 적시는가 杜鵑何事淚山花 두견하사루산화
남은 한을 풀명자나무 늙은 등걸에 의탁함인가 遺恨分明託古樝 유한분명탁고사
슬픔은 맑고 충정이 붉은 것이 어찌 네 홀로만이더냐 淸怨丹衷胡獨爾 청원단충호독이
충신과 지사란 결코 다른 마음을 품지 않는단다 忠臣志士矢靡他 충신지사시미타


정여창의 호는 일두인데 중국 정이천(주역으로 유명)의 말에서 따온 말인데 "천지우주 사이에서 보잘 것 없는 한마리의 좀벌레"라는 뜻으로 일두(一蠹)를 호로 했습니다.네 그렇습니다.두(蠹)는 좀벌레입니다.

유학자들의 호는 자신을 낮추는 겸양의 모습이 많이 보입니다만 특히 정여창의 호는 그 중에서도 겸양의 극강입니다."겸양"은 자신을 낮추어 저절로 다른 사람들을 높인다면 그냥 나를 낮추지 않고 다른분들을 높이는 것은 "존경"입니다.

 

(필사)

수기치인(修己治人)은 스스로 수양하고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으로 군자의 두가지 기본 과업인데,정여창과 김굉필은 수기(修己:자신의 몸을 닦음)를 중시하는 계열이라면 김일손은 사장(詞章:문장文章과 시가詩歌)을 중시하면서 치인(治人)을 중시하는 계열로 보시면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최치원 역사공원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학사루길 4

 

신라시대의 학자 최치원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공원입니다. 최치원 선생이 어린 시절 학문을 닦았던 학사루와 상림공원 등이 바로 옆에 있습니다.

 

현재 최치원 역사공원의 건물은 멋지게 외관은 지어졌지만 그 속의 컨텐츠는 채워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현재로는 빈약합니다.현재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문을 여는데 9시30분쯤 갔더니 둘러보아도 괜찮다고 하여 관람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옆의 함양박물관도 둘러보았습니다.

 

 

고운 기념관 앞에 인백기천(人白己千)이라는 최치원의 글이 각자되어 있는데 "다른 사람이 백번을 노력하면 나는 천번을 노력한다"는 의미입니다.최치원은 천재인데다가 노력도 엄청나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최치원은 현묘지도라는 풍류를 일깨워주었는데 그는 신라에서 이전부터 전하는 우리고유의 풍류가 유교의 충효,불교의 봉선(奉善),도교의 무위불언(無爲不言)을 포괄한다고 이해하였습니다.최치원은 난랑비의 주인공으로 경문왕을 상정하고 그가 인(仁)으로써 사람을 대하였고,도(道)로써 사람을 인도하여 유교적 이상인 인과 효를 이루는데 능숙하였던 인물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결국 최치원이 유,불,선 삼교의 풍류도에서 이야기하는 애민사상은 효와 충,인과 도가 그 중심 사상임을 엿볼 수 있습니다.또한 최치원은 "무릇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고 사람은 나라마다 다름이 없다"라고 하여 그는 국가 안녕과 백성 교화를 위해 추구되었던 풍류는 오로지 구별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 자신 진골이 아니었으니 아마도 그 신라의 지독한 구별에 환멸을 느끼며 가야산으로 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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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역사를 살펴 현재에 반추해보면 위로 위정자가 혼매하면 방법만 다르지 여러가지가 참화를 당합니다.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사람이 죽고, 국민들이 믿을만한 사람에게는 오히려 죄목을 뒤집어 씌우는 일이 벌어졌고,무엇보다 R&D를 삭감하여 미래까지 어둡게 만드는 것이 개인적으로 가장 안타깝습니다.요즘 세상이 돌아가는 속도를 보면 지금 약간만 걷다보면 나중엔 뛰어도 따라가기 어려운 세상인데 말입니다. 천지비괘의 시대를 지나 빨리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세상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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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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